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반항의 정신,
모더니티의 상징

프랑시스 풀랑크(Francis Poulenc)는 1930년대 초, 마리-로르 드 노아이유(Marie-Laure de Noailles)에게 코코 샤넬을 “특출난 지성(Prodigiously intelligent)”이라 소개했다. 이는 마리-로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으며, 이 두 여성의 공통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.  

이 두 여인의 어린 시절은 사실과 허구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. 가브리엘 샤넬의 경우 어린 시절의 불행함을 철저히 감춘 채 자기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. 마리-로르는 부유한 독일 은행가 집안과 악명높은 사드 후작의 후손인 프랑스 귀족 집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, 매우 교양있는 특권층이나 애정이 결여된 집안에서 자라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. 마리-로르의 독특한 조모, 쉐비녜(de Chevigné) 백작 부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속인 물게르 망트 부인을 만들어내는데 일부 영감을 주기도 했으며, 마리-로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.

샤넬과 마찬가지로 마리-로르 또한 자신의 예술가적 본능을 따랐다. 그녀가 샤를 드 노아이유와 결혼한 후 살았던 파리의 타운하우스에는 이미 들라크루아에서 렘브란트, 고야, 루벤스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대가들의 명작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다. 노아이유 부부는 데코레이터 장-미셸 프랑크에게 이 집의 새로운 인테리어를 맡겼고, 이 공간은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넓게 드러난 공간에 진귀한 가구와 짚, 양피지 등 독특한 소재로 꾸며졌다. 이 무심함의 미학은 샤넬 수트를 즐겨입던 마리로르 자신의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한다. 아베 뮈니에(Abbé Mugnier)에 따르면 그녀는 40여 벌의 서로 다른, 하지만 거의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샤넬 수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.

늘 단정한 우아함을 추구했던 디자이너 샤넬은 선을 조화롭게 사용하며 옷을 단순화해 움직임이 자유롭게끔 했다. 아름다움과 기능을 동시에 이뤄내며 샤넬은 새로운 모더니티를 정의한 것이다.

코코와 마찬가지로 반항하는 영혼이자 순응을 거부했던 마리-로르는 도발을 즐겼다. 가브리엘이 "경제위기에 맞서는"것을 돕고자 선보였던 대담한 다이아몬드 주얼리를 처음으로 착용한 이들 중 하나였던 마리-로르는, 반짝이는 깃털 브로치를 착용하고 1932년 보그지에 등장했다.

샤넬은 패션의 혁명을 일으켰고, 뮤즈이자 후원자, 그리고 나중에는 화가 겸 작가로도 활동했던 마리-로르는 남편과 함께 브라크, 피카소, 발튀스, 몬드리안, 자코메티, 만레이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의 컬렉션을 수집함으로써 예술사에 기여했다. 노아이유 부부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으며 다양한 이들을 초청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비롯한 예술계 신예들을 발굴하는 안목을 키웠다. 이들은 영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고 마르케비치, 풀랑크, 스트라빈스키 등 작곡가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.

가브리엘 샤넬 또한 예술계의 숨은 후원자였는데, 그녀는 가르슈에 있는 자신의 빌라를 스트라빈스키와 그 가족에게 거처로 내주기도 했다. 1924년 샤넬은 피카소가 무대 장식을 맡았던 디아길레프의 발레 '르 트랑 블루'의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으며, 다른 여러 작품과 르누아르의 영화를 위한 의상 작업도 맡은 바 있다. 그녀는 당대의 시인들 및 달리, 니진스키, 비스콘티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. 코코는 또한 콕토와도 가까운 친구였는데, 마리-로르는 평생동안 콕토에게 푹 빠져있기도 했다. 마리-로르는 영원한 낭만주의자였으며,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화려한 연애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혼자였던 코코 샤넬 또한 사랑이 없으면 여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남겼다. 

소피 브라우네르(Sophie Brauner)

마리 로르 드 노아이유 © 앙리 마티니 / 로제-비올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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